영화 《오딧세이》를 보고 키르케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그때 만든 인물관계도를 블로그에 정리해두긴 했지만, 정작 소설은 미뤄왔다. 추석 연휴 같은 긴 휴일에 드디어 펼쳤는데, 예상과 다르게 하루 만에 끝냈다. 524쪽짜리 양장본을 하루에 읽었다는 건 책이 그만큼 읽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그랬는지 기록으로 남겨둔다.
어떤 책인가: 오디세이아의 조연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
《키르케》(Circe)는 미국 작가 매들린 밀러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원작은 2018년 4월 Little, Brown and Company에서 출간되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한국어판은 2020년 5월 이봄에서 이은선 번역으로 나왔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바꾸는 마녀로 잠깐 등장하는 키르케를,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까지 1인칭으로 따라간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지만 신도 인간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시작해,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아이아이에 섬으로 유배되고, 그 섬에서 수천 년을 보내며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작가의 이력이 이 소설의 밀도를 설명한다. 밀러는 브라운대학교에서 고전학 학사·석사를 마치고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셰익스피어를 가르친 사람이다. 첫 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로 2012년 여성 문학상(Women's Prize for Fiction)을 받았고, 《키르케》는 2019년 같은 상의 최종후보에 올랐다(출판사 소개 기준). 그리스 신화를 각색한 소설은 많지만, 원전을 언어로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쓴 재해석이라는 점이 이 책의 차이점이다.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비교하면 방향이 정확히 보인다. 전자가 《일리아스》를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시선으로 다시 썼다면, 후자는 《오디세이아》를 마녀 키르케의 시선으로 다시 쓴다. 두 작품 모두 '영웅 옆에 있던 사람에게 목소리를 준다'는 같은 문법을 쓴다. 차이는 화자의 위치다. 파트로클로스는 영웅을 사랑한 인간이었고, 키르케는 영웅과 대등하게 마주하는 신이다. 그래서 《키르케》는 전작보다 서사의 반경이 훨씬 크다 — 한 인간의 생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친 신의 시간을 다룬다.
왜 하루 만에 읽히는가
524쪽을 하루에 읽게 만든 요인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1인칭 화법의 힘이다. 《오디세이아》에서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장식하는 위험한 존재다. 이 소설은 그 관점을 뒤집어 키르케의 입으로 모든 것을 말하게 한다. 마녀로 불리기까지의 과정, 돼지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오디세우스와의 시간이 그녀에게 무엇이었는지. 신화가 설명하지 않았던 행간을 화자 본인이 채우는 구조라, 읽는 내내 '다음 장면은 어떻게 말해줄까'가 궁금해진다.
둘째, 에피소드 구조가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책은 키르케의 삶을 몇 개의 큰 사건 — 형제자매와의 어린 시절, 글라우코스와의 만남, 유배, 메데이아의 방문, 미노타우로스의 탄생, 오디세우스의 도착 — 중심으로 나눈다. 그리스 신화의 유명 인물들이 프로메테우스, 헤르메스, 다이달로스, 아리아드네, 메데이아, 오디세우스 순으로 차례로 등장하는데, 각 에피소드가 다음 에피소드의 복선을 물고 들어간다. 신화를 미리 알면 '이 인물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하는 확인의 재미가 있고, 몰라도 이야기 자체가 앞으로 끈다.
셋째, 문장이 짧고 아프다. 번역 문체가 서정적이면서 담백하다. 예를 들어 소설 첫머리, "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로 시작해 신들의 딸이면서 누구의 목록에도 오르지 못한 존재임을 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사건을 늘어놓는 대신 한 문장으로 상황의 핵심을 찌르는 문장들이 중간중간 있어서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인데도 밑줄을 긋게 된다.
이 책이 실제로 하는 이야기: 성장 서사로서의 키르케
읽고 나면 이 책의 장르가 '신화 판타지'보다 '성장 소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키르케는 신이라서 성장할 필요가 없는 존재지만, 정작 이 소설에서 성장한다.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한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자기 능력의 대가를 치르고, 사랑하고 잃고, 모성을 경험하고, 마침내 자기 삶의 조건을 스스로 정한다. 출판사 리뷰가 "성장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 신의 성장이기에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고 쓴 것이 과장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관점 뒤집기의 구체성이 좋았다. 예컨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바꾸는 장면. 《오디세이아》에서는 마녀의 악행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이전에 섬에 들이닥친 선원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먼저 그려진다. 같은 사건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설교 없이 구조로 보여준다. 사실 확인의 방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고전 읽기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소설이 던지는 질문도 현대적이다. 키르케는 사회가 여성에게 허용한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라서 '마녀'가 된다. 능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능력이 기존 질서에게 위협일 때 붙는 이름이라는 것. 작가 스스로 "서양 문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마녀"라는 점에 매혹되었다고 말했듯(예스24 인터뷰 기준), 이 책은 3천 년 전 이야기로 지금의 질문을 다룬다. 신들의 세계를 그리지만 그 세계의 규칙 — 가문, 계보, 말석, 허락받지 못한 재능의 취급 — 은 낯설지 않다.
또 하나 눈에 남는 건 시간의 처리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 신이다. 소설은 이 불멸을 축복이 아니라 조건으로 쓴다. 수천 년을 살아야 하는 존재에게 '성장'이란 무엇인가. 짧은 인간의 생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디세우스와의 에피소드가 유독 아픈 건, 불멸자가 필멸자를 사랑하는 일의 구조적 불균형을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이 책은 통속적인 신화 로맨스와 확실히 갈린다.
다만 기대 조절은 필요하다. 액션 판타지를 기대하면 실망한다. 마법 전투가 벌어지는 책이 아니라, 한 여성이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디며 자기 자리를 만드는 책이다. 속도는 빠르지만 폭발이 아니라 침수처럼 읽히는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를 잘 모르는데 읽어도 되는가
된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신화 지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배경을 본문 안에서 준다는 것이다. 한국어판에는 권말에 등장인물 해설이 붙어 있어서 이름이 헷갈릴 때 뒤져볼 수 있다.
그래도 두 가지는 미리 알고 시작하면 좋다. 첫째, 키르케의 가족관계다. 헬리오스의 딸이고, 크레타 왕비 파시파에의 언니이고, 황금양털의 왕 아이에테스의 누이이고, 메데이아의 이모다. 이 관계가 뒤엉켜 보이면 필자가 정리해둔 《키르케》 인물관계도를 함께 보면 된다. 둘째, 《오디세이아》 전체 줄거리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가는 여정이라는 큰 틀만 알면 소설 후반부의 감정이 훨씬 선명하게 읽힌다.
실전 팁을 하나 더 보태면 — 인물 해설을 처음부터 다 읽지 말 것. 권말 해설에는 후반부 전개에 대한 언급이 섞여 있어서, 초반에 전부 읽으면 스포일러를 자초한다. 이름이 막힐 때마다 찾아보는 사전으로만 쓰는 게 안전하다. 하루 만에 읽는 사람에게 특히 유효한 순서다.
그리고 한 가지 실험도 해볼 만하다. 소설을 다 읽은 뒤 《오디세이아》의 키르케 장면(10권)을 원전이나 요약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 같은 문장이 완전히 다르게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게 재해석 소설이 주는 가장 큰 부가가치다 — 원전을 새로 읽고 싶게 만든다.
정리: 누가 읽을 책인가
한 줄로 말하면 — 고전을 '그렇구나'가 아니라 '왜 그렇지?'로 읽고 싶은 사람의 책이다. 다음에 해당한다면 휴일 하루를 통째로 내주는 걸 아깝지 않아 할 것이다.
- 영화 《오딧세이》나 그리스 신화에 흥미가 생긴 뒤 원전 진입은 부담스러운 사람
- 관점을 바꿔 쓴 재해석(레티컬) 소설이 좋았던 사람 — 예컨대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바로 다음 책
- 사건보다 한 인물의 내면이 오래 걸리는 변화를 따라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
반대로 빠른 전개의 판타지나 로맨스를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오디세이아》의 키르케 장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독자라면, 이 소설이 그 장면에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덧입힌다는 점은 미리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
독자의 결론 — 결말을 말하기 전에 읽을 것
이 섹션은 결말을 다룬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는 참고자료로 건너뛰기를 권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남은 문장은 하나다. 키르케는 여성이었고, 그리고 신들 중에서 가장 인간다웠던 존재였다. 영원을 사는 신들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동안, 그녀는 사랑과 상실을 겪으며 인간처럼 선택해야 하는 존재로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불멸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한다. 필멸의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신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 그 결정까지가 아름다운 스토리였다.
이 결말이 이 소설의 모든 주제를 하나로 묶는다. 능력을 두려워한 가족에게서, 여성에게서, 그리고 신의 영원함에게서 — 그녀가 마침내 자기 것으로 선택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였다. 사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에 담기는 무게. 하루 만에 524쪽을 읽게 만든 힘이 어디서 왔는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알게 된다.
참고자료
- 매들린 밀러 공식 사이트의 Circe 페이지 — 작가가 직접 제공하는 책 소개
- Circe (novel) — Wikipedia — 원작 출간 정보와 평가
- 《키르케》 예스24 상품 페이지 — 한국어판(이봄, 이은선 역, 2020) 판권 정보
- Theoi Greek Mythology의 키르케 항목 — 키르케가 등장하는 고전 원전 출전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