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riting is abysmal. I would be ashamed to have written any part of this script."
영화를 보기 전날 나는 이 문장을 읽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현대 영어로 옮긴 번역가 에밀리 윌슨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각본에 내린 판결문이다. 2억 5천만 달러짜리 피서용 오락이라는 혹평까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주머니에 넣고 상영관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마음에 남은 건 오디세우스의 얼굴이었다. 혹평은 주머니 속에 남겨두고 나왔다.
아이맥스로 볼 생각이었다. 표가 나오지 않았다. 개봉 한 달 가까이 지나도록 아이맥스 관은 계속 매진으로 돌아갔고 결국 일반관에서 봤다. 미리 아쉬워했는데 막상 상영이 시작되고 나니 화면 크기는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이 이야기의 진짜 난제는 처음부터 서사 쪽에 있었으니까.
오디세우스가 잘못을 말할 때
이 작품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전투도 괴물도 아니었다. 오디세우스가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는 순간들이었다. 영웅이 영웅담 대신 잘못의 목록을 늘어놓는 구성이라 그 장면들이 유난히 슬펐다.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길목마다 동료를 잃고 그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는 인물. 놀란의 필모그래피가 늘 그래왔듯 죄책감이 서사의 엔진으로 쓰인다. 잘못을 아는 남자의 여정이라는 프레임은 이 원작을 놀란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에 자연스럽게 올려놓는다.
하나만 꼽자면 페넬로페 앞이었다. 표류를 끝내고 돌아온 남편이 아내 앞에서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는 순간이 가장 슬펐다.
원작을 아는 사람은 안다. 오디세이는 정신없는 이야기다. 10년 표류가 시간순으로 늘어서 있지 않고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겹겹으로 접혀 있다. 목장에서 시작해 트로이로 점프하고 다시 목장으로 돌아온 뒤에야 바다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이 이미 이천칠백 년 전에 비선형 구조를 쓰고 있었다는 게 이 원작의 놀라운 점이다. 시간을 접는 놀란과 접힌 호메로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놀란은 이 접힌 서사를 시간과 공간을 자르는 자기 방식대로 다시 펼쳤다. 잘 풀어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정신없는 원작이라는 걸 알고 들어간 나도 흐름을 놓치는 구간이 없었다. 일반인 관객 입장에서 이보다 나은 정리를 상상하기 어렵다.
번역가가 본 것, 관객이 본 것
윌슨의 비평은 성격이 다르다. 그녀는 재미를 묻지 않고 텍스트를 묻는다. 그녀가 가장 아프게 찌른 대목은 폴리페모스 처리다. 원전 최고의 트릭인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가 이 각본에선 원천 불가능하다. 화면 속 폴리페모스는 술도 마시지 않고 이웃도 없는 꼭두각시라 속일 대상 자체가 없다. 지능으로 상대를 제압하던 오디세우스가 여기선 폭력으로만 문제를 푼다. 그래서 제목이 An Uncomplicated Man이다. 복잡한 남자가 아니라 단순한 남자가 됐다는 것. 윌슨은 자기 번역본 첫 줄을 인용해가며 이 격차를 지적했다.
페넬로페도 마찬가지다. 원전의 거위와 독수리 꿈, 남편 귀환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통째로 사라지고 인형을 껴안는 남편의 아내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그녀는 썼다. 칼립소는 신의 이중잣대를 고발하던 웅변가에서 무급 치료사로 강등됐다. 신들은 등장하지 않는데 사건은 신의 벌처럼 굴러가는 모순도 지적됐다.
아테나 문제도 비슷하다. 원전의 아테나는 전략과 전쟁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영화의 아테나는 윌슨의 표현대로 전략가가 아니라 상처받은 피해자 혹은 양심의 투영이다. 제우스의 법을 둘러싼 이중잣대도 마찬가지다. 트로이인을 속여 죽이면 악이고 구혼자를 속여 죽이면 선이 된다. 그리스 땅의 낯선 이는 대접하고 이국의 낯선 이는 학살한다. 장면마다 가치 기준이 뒤집히는데 영화는 그 모순을 자각하지 않는다. 촬영지 문제까지 거론된다. 점령 상태의 서사하라에서 이 영화를 찍으며 그 땅의 폭력을 배경으로 썼다는 지적은 예외 없이 무겁다.
흥미로운 건 평가가 정확히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작품 자체는 로튼토마토 비평가 지수 95%, 시네마스코어 A다. 도마에 오른 건 각본뿐이다. 같은 필름을 보고 시각이 이렇게 갈리는 건 2026년 여름에 이 작품이 걸어온 궤적이기도 하다.
나는 이 간극이 흥미로웠다. 상영관 안에 있는 동안 나는 그 지적들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느낀 건 슬픔과 속도감이었다. 하루 전에 읽은 혹평이 무색할 정도로 화면 속 서사는 앞서 달렸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바빴다. 텍스트를 다시 읽고 나서야 지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지금도 동의하게 되는 건 페넬로페다. 원전의 페넬로페는 아내 이상이었다. 이십 년을 혼자 버티며 자기 방식으로 남편을 시험하는 인물이다. 각본이 그 인물을 귀환을 받아주는 역할로 줄였다는 지적을 부정할 근거가 화면에 없었다. 관객의 눈과 번역가의 눈은 같은 장면을 다른 곳에 둔다. 어느 쪽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각본책은 만점에 가깝다
이상하게도 각본 책의 평가는 정반대다. 파버 앤 파버에서 나온 The Odyssey: The Complete Screenplay는 굿리즈에서 4.65점, 초기 평가 31건 기준이다. 리뷰어들은 완성본에 그대로 이식된 놀란의 묘사와 비트를 읽는 맛을 높이 샀다. 대사가 적고 묘사 중심인 놀란의 스크립트 습관은 던커크에서 이미 검증된 방식이다. 오펜하이머 각본집을 읽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기대한 것도 비슷했다. 완성된 영화의 문장을 종이 위에서 다시 만나는 일. 그 기대에 충실한 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레딧 스크린라이팅 커뮤니티에서는 캐릭터가 중심인 타란티노 대비 놀란 스크립트를 마스터 블루프린트라 부르는 글도 나왔다. 반대 진영도 있다. 스크립트 매거진은 제우스의 법이라는 대사의 무한 반복이 인터스텔라의 머피의 법칙처럼 의도와 다르게 웃음 포인트가 됐다고 짚었고 조나단 놀란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영화 비평가들은 각본이 영화의 가장 깊은 상처라고 쓰고 스크립트 독자들은 같은 텍스트에 만점을 준다. 읽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점수가 갈라지는 지점 자체가 이 작품의 정체인 셈이다.
극장을 나서며
돌아오는 길에 내 자리를 생각했다. 나는 그냥 일반인 관객이다. 원전을 번역한 적도 없고 각본을 라인 단위로 뜯어본 적도 없다. 그 눈으로 본 이 영화는 너무 재밌었다. 접힌 서사가 펼쳐지는 걸 보는 맛이 있었고 오디세우스의 고백은 슬펐다. 윌슨의 혹평에 동의하는 부분도 이제 생긴다. 다만 그 지점들과 내 재미가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았을 뿐이다. 아이맥스 표가 나오면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처음엔 표가 나오지 않아 일반관에서 봤지만 이야기의 퍼즐이 어떻게 짜이는지 안 상태로 큰 화면에 다시 앉고 싶다.
윌슨도 마지막엔 감사로 글을 닫았다. 스트리밍 시대에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았고 인문학 위기론 속에서 오디세이 번역본이 팔려나갔다는 것. 혹평의 끝을 균형으로 장식하는 게 그녀 글쓰기의 정수라면 그 균형은 나에게도 유효하다. 극장에서 나는 재밌었고 책상 앞에서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영화는 내게 두 번의 오디세이를 남겼다. 하나는 스크린에서 왔고 다른 하나는 이제 서가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