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두 시쯤이었다. 회사 프로젝트 문서를 붙잡고 있던 그 시간에 나는 책장을 다시 넘기고 있었다. 마흔에 읽는 니체. 세 번째 읽는 중이다. 첫 독 때는 그냥 지나쳤던 구간이 이번에는 다르게 읽혔다.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아이가 되는 세 가지 변신 이야기. 그리고 그 밑에 붙어 있는 한 문장.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세 번 읽었는데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경험이 있다. 같은 문장이 남아 있건만 읽는 사람이 달라지면 문장도 달라진다. 아마 나는 그동안 낙타와 사자 얘기라면 다 아는 척하면서 정작 마지막 단계를 흘려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짐을 잘 지는 것과 짐을 내려놓는 것
니체가 말하는 첫 번째 단계는 낙타다. 낙타는 "나는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넌다. 책은 이 낙타 정신을 노예적 삶의 태도로 묘사한다. 주어진 진리와 도덕, 관습과 규율을 최고의 것으로 믿고 순종한다.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무거운 짐이 무겁단 말인가"라고 되물으며 무릎을 꿇고 등에 짐을 얹는다.
읽으면서 웃을 수가 없었다. 이건 나 이야기였다. 회사에서 난이도 있는 프로젝트가 배정되면 나의 첫 반응은 언제나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였다. 물론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프로페셔널의 기본이다. 문제는 그 태도가 습관이 되면 짐 자체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이 프로젝트가 왜 어려운가, 이 요구사항이 정말 타당한가, 내가 져야 할 짐이 맞는가. 이런 질문 대신 그저 짐을 지는 요령만 늘어간다. 낙타는 효율이 좋아진다. 낙타인 채로.
두 번째 단계는 사자다. 사자는 "나는 하길 원한다"라고 말한다. 사막에서 마지막 주인인 거대한 용과 싸워 이기고 자유 의지의 주인이 된다. 남이 정한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단계다. 그런데 책은 여기서 정확한 지적을 한다. 사자는 기존 가치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는 것. 아니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아직 예라고 말하지 못한다.
마흔 즈음의 나를 이 두 동물 사이 어딘가에서 발견했다. 이론은 최소로, 실전은 최대로. 남이 정한 커리클럼대로 공부하지 않고 내 워크플로우를 직접 조립한다. 사자적 태도다. 그런데 어려운 프로젝트 앞에서 여전히 긴장하는 나를 보면 낙타도 남아 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중간지대. 사자가 되었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파괴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아이는 짐을 잊는다
그래서 세 번째 변신이 필요하다. 사자가 아이가 되어야 한다. 책은 아이 정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놀이에 흠뻑 빠져 몰두하듯 자기 삶을 긍정하며 사는 것. 니체는 그 특성을 일곱 가지로 표현했다. 순진무구함, 망각,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 그리고 성스러운 긍정.
이 목록에서 특히 두 가지가 걸렸다. 망각과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다.
아이는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울며 떼쓰다가도 곧 잊어버리고 다시 놀이에 뛰어든다. 실패를 기억하지 않는다. 실패의 서류철을 만들어 두고 꺼내 보며 다음 놀이를 설계하지 않는다. 그냥 다시 논다. 어른이라면 이것을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망각이 핵심 기술이다. 지난 실패의 무게를 창조의 순간마다 짊어지고 있으면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수 없다.
여기서 나는 아이와 어른의 결정적 차이를 하나 더 발견했다. 아이는 놀이의 규칙을 스스로 정한다. 모래밭에서 나무 막대 하나로 성을 짓는 아이에게 설계도도 감리도 없다. 놀이의 목적은 놀이 자체에 있다. 반면 어른의 일은 처음부터 남이 정한 규칙 안에서 시작된다. 평가 기준이 있고 납기가 있고 이해관계자가 있다. 그래서 어른의 몰입은 조건부가 되기 쉽다. 환경이 좋아야, 인정받아야, 보상이 있어야 몰입한다. 아이의 몰입에는 조건이 없다. 조건이 없는 몰입, 그래서 성스럽다는 것이다.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라는 표현도 그렇다. 남이 밀어야 굴러가는 바퀴가 아니다. 자기 안에 동력이 있는 바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처럼.
어려운 회사 프로젝트를 앞에 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순간 낙타로 있는 대신 아이가 되고 싶다. 짐을 잘 지는 사람보다 이 문제 자체를 놀이로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일정은 있고 요구사항은 있고 평가가 따른다. 그래도 같은 일을 하더라도 짐으로 지느냐 놀이로 놀느냐는 다른 삶이다. 방금 봤던 새벽의 나는 분명 전자 쪽이었다. 그래서 이 구간이 세 번째 독에서야 제대로 와닿은 것 같다.
성스러운 긍정으로 만들기
그럼 성스러운 긍정은 무엇인가. 나의 답은 이제 이렇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성스러운 긍정으로 만들고 싶다.
거창한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이 문장이 실제로 나에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성스러운 긍정을 남이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책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니체조차 힌트만 줄 뿐이다. 결국 지금 내 손에 있는 일, 오늘 새벽에 붙잡고 있던 그 프로젝트를 내가 스스로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긍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 일에서 나를 몰입하게 만드는 지점을 찾아 그걸 중심으로 일을 재배열하라는 뜻이다. 아이는 좋아하는 놀이의 구석에서 시작하지 싫은 구석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태도는 도구를 다루는 나의 방식과 닿아 있다. 나는 공부를 남의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클리핑 도구를 만들고 리뷰 시스템을 붙이고 위키로 쌓는다. 배움을 남의 강의실에서 소비하는 대신 내 장난감으로 개조한다. 돌아보면 그게 이미 놀이의 문법이었다. 문제는 그 문법을 회사 일 앞에서만 잊고 있었다는 것.
마흔에 세 번째 니체를 읽으며 결국 남은 질문은 하나다. 나는 내 분야에서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오늘 새벽의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웠다. 그래도 니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 물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이미 새로운 출발이다.
최근의 나를 돌아보면 답의 일부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요청과 잦은 미팅으로 시간을 잊고 살아. 몰입의 조건이 완벽해서가 맞다. 힘들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고 재미를 느끼려고 노력 중이다. 성스러운 긍정은 감정이 아니라 결정이라는 말이 여기에 있다. 재미는 오는 게 아니라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파이오니어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안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건 그 일을 짐으로 셈할지 놀이로 셈할지뿐이다.